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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성왕의 딸 매형공주

낚시천국 2009. 10. 16. 11:27

백제 성왕의 딸 매형공주

 

전사한 부왕 위해 사리 공양한 효녀
 

능산리 절터 사리함 명문에 기록 남아 백제왕실 여인신앙 증언한 유일 인물
위덕왕 누이동생, 누나 등 해석 분분

 



1994년, 한국 고고학계가 발칵 뒤집혀졌다. 1992년 부여 능산리 계곡 부근 진흙 물구덩이 속에서
우연히 건져 올린 백제금동대향로의 비밀을 풀 수 있는 열쇠가 드디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2년여에 걸쳐 능산리 고분군 계곡 일대의 발굴조사가 진행된 결과 목탑지 심초석 부근에서 사리감이 발견됐다.
조그만 우체통 모양의 돌로 된 사리감 표면에는 뚜렷한 글씨로 ‘百濟昌王十三秊太歲在 丁亥妹兄公主供養舍利’,
 즉 ‘백제 창왕 13년 정해년에 매형공주가 사리를 공양했다’는 명문이 새겨져 있었다. 비록 사리와 사리함은
이미 도굴된 상태였지만 사리감 표면에 적힌 스무 자의 글씨는 이곳이 과거 절터였으며,
특히 능산리 고분에 안장된 성왕을 기리기 위한 능사(陵寺)였다는 사실을 입증하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중요한 역사적 사실이 밝혀졌으니, 창왕의 누이이자 위덕왕의 딸이 사리를 공양한 주체였다는 것이다.

매형공주, 역사서에는 단 한 줄도 기록되지 않은 그녀의 존재는 이렇게 사리감의 발견을 통해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되었다.
비록 매형공주라는 단 네 글자밖에 남기지 않았지만, 그녀의 삶에서 불심의 흔적을 추적하기란 그리 어려운 일만은 아니다.
아버지 성왕과 남동생 위덕왕이 남긴 삶의 행적을 통해 그녀의 삶을 가늠해볼 수 있기 때문이다.

서기 6세기 중반, 신라와 백제는 나제동맹을 맺고 고구려를 공격해 한강지역의 영토를 수복했다.


그 가운데 한강 이남은 백제가, 한강 이북은 신라가 각각 나누었다.
새로운 강자 신라도 그러했겠지만 백제의 기쁨은 남달랐다. 76년 만에 꿈에 그리던 옛 영토를 되찾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백제의 감격어린 눈물이 채 마르기도 전인 2년 후 신라는 기습공격으로 백제군을 한강유역에서 몰아냈다.
당시 서른 살의 혈기왕성한 백제왕자 부여창이 신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한강지역으로 달려 나간 것은
수복의 기쁨만큼 이를 상실한 분노 또한 엄청났음을 반증한다.

당시 가야국을 흡수통합하고 화랑도를 주축으로 나날이 강성해져가는 신라는 한반도에 새롭게 떠오르는 태양과 같은 존재였다.


그리고 국호를 남부여로 바꾸고 다시 한 번 삼국의 패자가 되기를 꿈꾸는 백제의 야심 또한 만만찮은 것이었다.
전쟁이 길어지면서 아들 부여창의 안위가 걱정스러웠던 성왕은 몸소 군대를 이끌고 아들이 있는 백제군의 진영으로 나아갔다.
그런데 성왕이 군대를 이끌고 전선으로 나온다는 정보를 비밀리에 입수한 신라군은
전국의 모든 병력을 소집시켜 성왕이 지나가는 길목에 군사들을 매복시켰다.
결국 성왕은 관산성(현재의 충북 옥천)에서 신라군을 만나 대패하고 말았다. 『삼국사기』에는
성왕의 군대가 몰살되어 말 한필조차 살아 돌아오지 못했다고 전한다.

 

성왕이 다시 백제로 돌아왔을 때 그는 이미 사자(死者)가 되어 있었고, 차갑게 식은 그의 육신에는 머리가 없었다.
성왕의 머리는 신라군이 전리품으로 가져가 북청이라는 관청 계단에 묻어버렸던 것이다.
이는 삼국통일을 향한 길목에 커다란 장애물이었던 성왕의 머리를 밟고 계속 전진하겠다는 신라인들의 경고이자 다짐이었다.

신하들의 만류에도 신라와의 전쟁을 밀어붙였던 부여창은 결국 자신의 고집이 아버지를 죽게 했다는
자책감에 시달렸고, 급기야 왕위를 포기하고 출가를 하겠다고 선언했다.
왕실과 신하들은 간곡하게 부여창을 설득했고, 그는 아버지가 죽은 지 3년 뒤에야 비로소 피눈물을 흘리며 왕위를 계승했다.


그가 왕위에 오르자마자 가장 먼저 100명의 백제 청년들을 출가시키고, 선왕을 위해 능사를 창건한 것도 그의 죄책감과 무관하지 않다.

그러나 그곳 역시 100여년이 흐른 뒤,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에 의해 무참히 짓밟혔다.
공주가 바친 사리는 나당연합군에 의해 도굴되었고, 사리를 보호하기 위한 장치로 만들어진 석조사리감만 목탑지에 버려졌다.
절 또한 당시에 붙여진 이름조차 잃어버린 채 역사의 저편으로 쓸쓸히 자취를 감췄다.

사리감 명문으로 새겨진 스무 글자는 매형공주가 아버지 성왕의 비참한 죽음과 동생의 자책어린 한탄을,
찢어지는 가슴을 부여안은 채 묵묵히 지켜보았음을 알려준다.


사리감이 발견된 장소에서 멀지 않은 곳에 백제 예술의 정수로 일컬어지는 금동대향로가 출토되었고,
공주가 직접 사리함을 공양했다는 사실은 백제 왕실이 이 절을 짓는데 얼마나 많은 공을 들였는가를 짐작케 한다.

명문에 등장하는 ‘매형공주’가 정확하게 누구를 지칭하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학설이 분분하다.
매(妹)를 손아래누이로 해석해 창왕 즉 위덕왕의 누이동생 형공주로 풀이하거나, 매형(妹兄)을 누나라고
해석해 위덕왕의 누나 공주로 풀이하기도 한다. 또 (위덕왕의) 매형과 공주, 즉 여동생과 남편 부부라는 풀이도 등장했다.

 

정확한 이름조차 찾기 어려울 정도로 그녀에 대한 기록은 전무하지만,
이 사리감을 통해 드러난 매형공주의 존재는 우리 역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백제사에 등장하는 여인의 수는 침류왕의 어머니 아이부인(阿爾夫人), 열녀로 유명한
도미의 부인 등 손에 꼽기 힘들 정도로 적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도 불교를 신앙했다는 사실이 확인된 인물은 매형공주가 유일하다.
매형공주가 성왕의 능사를 건립하는데 사리감을 공양했다는 사실은 그녀가 능사를 건립하는데 있어서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했음을 의미한다. 이는 백제 왕실의 여인들에게 불교가 깊게 수용되었고,
당시 여인들의 신앙 활동이 상당히 적극적이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6∼7세기경 신라 여인들이 고승들로부터 경전을 배우고 왕실 여인들 중 다수가 비구니가 되었던 것으로 볼 때,
신라보다 훨씬 일찍 불교를 받아들인 백제 왕실의 여인들 또한 불사나
불교 신행에 매우 적극적이었을 것임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아버지의 죽음과 동생의 절망을 지켜봐야했던 매형공주.
그가 어떤 마음으로 사리를 공양했을지 짐작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다.
신라 노비의 손에 참수형을 당하고 목이 달아난 채 돌아온 아버지의 한 서린 영혼이
극락왕생하기를 발원했음은 불가지문의 일이다.

 

그러나 그 뿐이었을까. 현재로서는 들을 길 없는 매형공주의 목소리를
그녀의 아버지 성왕의 이야기 속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성왕은 신라의 노비 고도의 손에 참수되기 직전 비장한 어조로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과인은 매양 뼈에 사무치는 고통을 참고 살아 왔지만, 구차하게 살고 싶지는 않다.”

 

거의 한해도 거르지 않고 전쟁이 일어나던 시절, 살육의 현장으로 백성들을 몰아넣어 영토를 되찾고,
그 희생의 대가로 얻은 영토를 또다시 적에게 빼앗기는 과정을 반복했던 성왕에게 삶이란
뼈에 사무치는 고통의 시간이었던 것이다. 과부들이 속출하고, 부모 없는 자식들이 나날이 늘어가며,
열서너 살만 넘으면 창을 들고 전쟁터에 나가야 했던 난세에, 성왕의 딸 매형공주도 예외 없이 아비 없는 자식이 되었다.
부왕을 읽고 고아가 된 그 여인은 아버지의 묘소 부근에 사리를 묻고 그 위에 탑을 세우면서 이 땅에 불국토가 들어서기를 발원했다.

 

아마 그녀는 아버지의 죽음이 헛되지 않기를, 그 희생의 대가로 이 땅에 비극은 사라지고 평화의 시대,
즉 미륵의 나라가 열리기를 염원했을 것이리라. 그녀는 어쩌면 동생 위덕왕이 그 용화세계를 이뤄내는
미륵불이 되기를 발원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의 간절한 발원에도 불구하고 100년 뒤
백제는 나당연합군에 의해 멸망되고 말았다.

 

역사적 사실만을 두고 본다면 매형공주의 발원은 백제의 패망과 함께 무참히 부서진 것이라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종교적 측면에서 본다면 그녀의 기도가 결코 헛된 것만은 아니었다.
이 땅에 평화의 시대가 도래하고 불국토가 들어서기를 갈망했던 매형공주의 신실한 불심은
 이 땅에 불교를 꽃피운 홀씨가 되지 않았던가. 그녀가 조성한 사리감이 1500여 년간 땅속에서 잠자고 있는 동안
이 땅 산천 곳곳에는 사찰들이 들어섰고 부처님의 가르침은 한반도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지극한 마음과 간절한 염원이 만들어낸 선근의 씨앗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 것이 인과의 법칙이다.
오랜 시간 동안 매형공주는 잊혀졌지만 백제가 받아들인 불교의 진리가 여전히 이 땅을 밝히고 있는
오늘의 역사가 이를 입증하고 있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