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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용 시인, 반일의식 시로 승화

낚시천국 2010. 12. 8. 10:02


▲ 정지용 문학포럼 세미나에 앞서 정지용 시비 앞에서 헌화를 하고 있는 모습

 

 

정지용 시인은 시를 통해 자신의 반일의식을 드러냈고 식민지 청년으로서 민족적 정서를 시로 승화한 시인이었다.
정지용 시인을 아는 이들이라면 다 알고 있을 1902년 충북 옥천 출생, 1923년 휘문고보를 졸업한 후 도시샤대학 유학,

여건이 어려워 유학 후 학교에서 교편을 잡는 조건으로 유학했으며, 일본 유학을 마친 후 모교에서 영어 교사로 재직했다는

얘기를 하고자 함이 아니었다.

1일 정지용 시인의 모교인 일본 교토 도시샤대학에서 개최된 국제 정지용 문학포럼에서 '정지용의 시세계'라는 제목으로

발제를 맡은 오세영(시인, 정지용문학상 수상자, 서울대 명예교수) 교수는 정지용 시인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내놓았다.

 

24년의 문학 생애 동안 습작기로부터 1926년까지 민요풍의 시, 1926년부터 1932년까지의 모더니즘 계열 시,

1933년부터 1935년까지의 카톨릭 신앙시, 1936년부터 1945년까지의 자연시 등 네 가지 경향으로 정지용 시의 특성을 나눈

오 교수는 '유리창', '겨울', '바다' 등의 작품이 영미 모더니즘을 소화해 한국적 아름다움으로 승화한 작품이라고 소개했다.

특히 시작 말년에 쓴 '백록담'이 절정에 있는 작품이라고 밝혔다.

오 교수는 정지용 시인이 시로 직접 언급하지는 않았으나 많은 시에서 식민지 청년의 울분과 비판의식이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다고 주장했다.
정지용 시인이 민족의식을 표현한 것은 민족 본질적 정서를 표현한 것이며, 유학후에 민족적 자각이

싹튼 것일 것이라고 추정했다.

대중가요로 만들어져 국민들에게 잘 알려진 '향수'도 저항시는 아니지만 잃어버린 고향 얘기를 통해 민족이 지켜야 할

인간적인 정서, 공동체로의 회귀를 노래하고 있다고 밝히고, 일본에 유학하며 고향에 있는 부모님을 추억하는 것 자체가

일제에 대한 반일의식이라고 볼 수 있다고 보았다.

오 교수가 특히 강조한 부분은 '카페프란츠', '장수산1', '백록담' 등의 시어에 보이는 반일정서와 비판의식이다.
식민지배국에 와서 느껴야 했던 식민지 지식인의 슬픔과 고뇌를 얘기한 것은 정지용 시인보다 20년 가까이 늦게

같은 도시샤대학에 입학하게 된 저항시인 윤동주 시인과 궤를 같이 하고 있다고 밝혔다.

윤동주 시인의 시에서도 직접적인 저항 시어가 없었으나 저항시인으로 추앙받고 있듯이 정지용 시인 역시

식민 피지배 젊은이로서 저항을 노래했다고 보았다.

<카페프란츠>에서 '이 놈의 머리는 빗두른 능금/ 또 한 놈의 심장은 벌레 먹은 장미/ 제비처럼 젖은 놈이 뛰여간다'라고

노래한 부분은 이미 청년이 가져야 할 꿈과 열정이 아니며, 식민지배를 받고 있는 젊은이의 울분과 고뇌, 슬픔을 나타내며

비정상적인 상태를 나타내고 있다. 특히 이 시에서 '나는 나라도 집도 없단다/ 대리석 테이블에 닿는 내 뺨이 슬프구나'라고

고백한 부분은 일제에 저항하고 있음을 보여준다고 주장했다.

감각적 언어로 아름다움을 표현하고 있지만 사실은 일제에 저항하려는 반일정서와 함께 이에 맞서 투쟁하지 못하고

무너져가는 자학과 자기비판적인 측면을 담고 있다고 밝혔다.
<백록담>은 한라산에 오르며 느낀 정서를 표현한 것으로, 송아지를 낳자마자 달아난 어미소와 어미를 찾아

사람이나 말에게도 달라붙는 애처로운 송아지를 빗대며, '우리 새끼들도 모색(毛色)이 다른 어미에게 맡길 것을 나는 울었다'라고

노래하고 있다.

이는 나라를 빼앗겨 의지할 곳 없는 내 자손, 후손들에 대한 걱정이고 절망의 표현이라는 것이다.
<장수산1> 역시 우리 민족의 상징 나무인 소나무를 베어낸 장수산에서 뼈를 저리우는 추위를 이겨내기 위해

'오오. 견디랸다 차고 올연히 슬픔도 꿈도 없이 장수산 겨울 한밤내......'라고 결의를 다진다.
오 교수는 정지용 시인의 시가 저항성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누구도 언급하고 있지 않지만

한국 지식인의 좌절과 절망 속에서도 유학을 통해 민족적 자각을 하고 저항을 담아내고 있다고 말을 맺었다.


 

두 번째 발제인 '정지용 동시의 밫깔과 향기'에서 윤삼현(아동문학평론가, 문학박사) 평론가는 1920년대 아동문화운동에

편승한 성인 시인들의 동시 창작이 활기를 띠었고 동요 황금기였던 시기에 총 23편에 달하는 정지용 시인의 동시는 유독

시 형식을 갖추며, 한국동시의 개척자적 구실을 했다고 밝혔다.
즉 교토 유학시절 전기에 쓰여진 정지용의 동시는 그동안 일정한 틀을 가졌던 동시에서 벗어나 자유로움을 갖춘

현대 동시로 연결되는 구실을 하며 한국 동시 발전에 큰 영향을 끼쳤다는 것이다.

특히 윤삼현 평론가는 '해바라기'를 정지용 동시의 백미로 꼽으며, 시적 대상의 적확한 묘사력을 통해 명쾌한 시적 의미를

구현하고 모국어를 현대화시킨 탁월한 업적을 인정받는 시인으로 자리매김했다고 평가했다.

세 번째 발제자인 정종현(교토대학 인문과학연구소 외국인 연구자) 연구원은 교토 유학 시절 정지용 시인의 흔적을 찾아

사진 등을 제공하며, 유학 시절에 보였던 정지용 시인의 의미있는 흔적을 재구성했다.
정지용기념사업회 오양호(인천대 명예교수) 회장의 사회로 진행된 이날

세미나에 앞서 조희열 전통춤연구소 단원들이 정지용 시인 및 윤동주 시인

앞에서 진혼굿을 벌이는 한편 시비에 헌화하는 순서를 가졌으며 도시샤대학 일본문화센터 나가사와씨가 대학 대표로 나와 방문단을 맞았다.

40여명의 방문단을 이끌고 국제 정지용문학포럼을 주관한 심대보 문화원장은 "정지용 시인의 모교에 와서

이렇게 진지하게 정지용 시인의 문학사적 가치를 논하고 새로운 사실을 알아가는 과정이 정말 소중하다.

참가자 모두가 하나라도 더 알려고 하는 진지한 자세를 보여 매우 성공적인 문학포럼이 되었다"고 자평했다.

 


▲ 정지용 시인이 거닐며 시상을 떠올렸던 압천의 풍광. 압천은 지금 대부분 공원화해서 정리를 해놓았는데

가끔은 풀이 자라고 하천 안에 모래톱도 생겼다. 이밖에 정지용 시인이 다녔던 카페프란츠가 있던 카페 거리는

아쉽게도 지금 재개발돼서 옛날흔적이 거의 남아있지 않다.

 


▲ 조희열 전통춤연구소 단원들이 진혼굿을 추는 모습

 


▲ 정지용포럼 참가단

 

 


아래는 이원형(51회)선배님이 답사를 기행을 다녀온 사진입니다.

참고하여 관람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