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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덕사 버선꽃-군서초 서화인

낚시천국 2009. 11. 29. 08:21





















수덕사의 버선꽃

 

『도련님, 어서 활시위를 당기십시오.』
시중 들던 할아범이 숨이 턱에 차도록 채근을 하는데 과연 귀를 쫑긋 세운 노루 한 마리가 저쪽 숲속에서 오고 있었다.
활시위가 팽팽하게 당겨졌고 화살이 막 튕겨지려는 순간 수덕은 말없이 눈웃 음을 치며 활을 거두었다.


아니 도련님, 왜 그러십니까?
몰이를 하느라 진땀을 뺀 하인들은 활을 당기기만 하면 노루를 잡을 판이기에 못내 섭섭해 했다.
너희들 눈에는 노루만 보이느냐? 그 옆에 사람은 보이지 않느냐? 이 산골짜기에 저런 처녀가?하인들은 모두 의아해 했다.
 

도련님, 눈이 부시도록 아리땁습니다. 노루 대신 여인을… 헤헤.
에끼 이녀석, 무슨 말버릇이 그리 방자하냐. 자 어서들 돌아가자.
수덕은 체통을 차리려는 듯 일부러 호통을 치고 갈 길을 재촉했으나 가슴은 뛰고 있었다.
노루사냥이 절정에 달했을 때 홀연히 나타난 여인, 어쩜 천생연분 일지도 모 른다는 생각이 들자 수덕 도령의 가슴은 더욱 뭉클했다.

차라리 만나나 볼 것을… 양반의 법도가 원망스럽기조차 했다.


이랴!
마상에서 멀어져가는 여인을 뒤로 하고 집에 돌아왔으나 들떠있는 수덕의 가 슴은 진정되지를 않았다.
책을 펼쳐도 글이 눈에 들어올 리 없었다. 눈에 어리는 것은 여인의 모습뿐.
하는 수 없이 도령은 할아범을 시켜 그 여인의 행방을 알아오도록 했다.
할아범은 그날로 여인이 누구이며 어디 사는가를 수소문해 왔다.
그녀는 바로 건넛마을에 혼자 사는 덕숭 낭자였다.
아름다웁고 덕스러울 뿐 아니라 예의범절과 문장이 출중하여 마을 젊은이들이 줄지어 혼담을 건네고 있으나

어인 일인지 모두 일언지하에 거절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수덕의 가슴엔 불이 붙었다.


자연 글읽기에 소홀하게 된 수덕은 훈장의 눈을 피해 매일 처녀의 집 주위를 배회했다.
그러나 먼 빛으로 스치는 모습만을 바라볼 뿐 낭자를 만날 길이 없었다.
어느 날 밤. 가슴을 태우던 수덕은 용기를 내어 낭자의 집으로 찾아 들었다.
덕숭 낭자, 예가 아닌 줄 아오나….
지체 높은 도련님께서 어인 일이십니까?
낭자! 나는 그대로 인하여 책을 놓은 지 벌써 두 달, 대장부 결단을 받아 주오.
두 볼이 유난히 붉어진 낭자는 한동안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가 입을 열었다.

 
일찍이 비명에 돌아가신 어버이의 고혼을 위로하도록 집 근처에 큰 절 하 나를 세워 주시면 혼인을 승낙하겠습니다.
염려마오. 내 곧 착수하리다.
마음이 바쁜 도령은 부모님 반대도, 마을 사람들의 수군거림도 상관치 않고 불사에 전념했다.
기둥을 가다듬고 기와를 구웠다.

이윽고 한 달만에 절이 완성됐다.
수덕은 한걸음에 낭자의 집으로 달려갔다.
이제 막 단청이 끝났소. 자 어서 절 구경을 갑시다.
구경 아니하여도 다 알고 있습니다.
 

아니 무엇을 다 안단 말이오.
그때였다.
도련님 저 불길을…절에서 불길이 솟구치고 있는 게 아닌가. 수덕은 흐느끼며 부처님을 원망했다.
낭자는 부드러운 음성으로 수덕을 위로했다.
한 여인을 탐하는 마음을 버리고 오직 일념으로 부처님을 염하면서 절을 다시 지으십시오.
수덕은 결심을 새롭게 하고 다시 불사를 시작했다.
매일 저녁 목욕재계하면 서 기도를 했으나 이따금씩 덕숭 낭자의 얼굴이 떠오름은 어쩔 수 없었다.
그때마다 일손을 멈추고 마음을 가다듬으며 절을 완성 할 무렵 또 불이 나 고 말았다.


다시 또 한 달.
드디어 신비롭기 그지없는 웅장한 대웅전이 완성됐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수덕은 흡족한 마음으로 합장을 했다.
도련님, 소녀의 소원을 풀어주셔서 그 은혜 백골난망이옵니다. 이 미천한 소녀 정성을 다해 모시겠습니다.

마침내 신방이 꾸며졌다.

촛불은 은밀한데 낭자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부부간이지만 잠자리만은 따로 해주세요.
이 말이 채 끝나기가 무섭게 수덕은 낭자를 덥썩 잡았다.


순간 뇌성벽력과 함께 돌풍이 일면서 낭자의 모습은 문밖으로 사라졌고 수덕의 두 손에는 버선 한짝이 쥐어져 있었다.
버선을 들여다보는 순간 눈앞에는 큼직한 바위와 그 바위 틈새에 낭자의 버선 같은 하얀 꽃이 피어있는 이변이 일어났다.





신방도 덕숭 낭자도 세속의 탐욕과 함께 사라졌다.
수덕은 그제야 알았다.
덕숭 낭자가 관음의 화신임을.
그리하여 수덕은 절 이름을 수덕사라 칭하고 수덕사가 있는 산을 덕숭산이라 했다.
지금도 수덕사 인근 바위 틈에서는 해마다 「버선꽃」이 피며 이 꽃은 관음 의 버선이라 전해 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