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을 등산으로 풀어보면
인생을 등산으로 풀어보면
세상이치라는 것이 다 비슷하다. 꿰어 맞추면 얼추 들어맞는다. 공부든 운동이든 잡기이든 등산이든, 다 사람이 하는 짓이라서인지 몰라도 이리저리 빗대면 인생살이와 별반 다름이 없다. 그런데 그 중에서도 등산은 특히 인생살이와 어쩌면 그렇게 똑 같은지 모르겠다. 등산은 인생의 축소판이다.
철이 들면서 뜻을 세우고 그 실현을 위하여 밑그림을 그리듯이, 등산도 오르고자 하는 산을 정하고 그 코스를 고른다. 꿈은 더 크겠지만, 대개는 실현 가능한 작은 목표부터 차례로 세우게 된다. 학교에서의 우등이라든가 경연대회에서의 우승이라든가 원하는 대학이라든가 좋은 직장이라든가 더 나아가 바라는 직업이라든가, 이렇듯 나이가 들면서 단계적으로 차차 더 높은 목표를 세우고 차근차근 하나씩 달성해 나가듯이, 등산도 야트막한 동네 뒷산을 오르는 것을 시작으로 점점 더 높고 험한 유명산을 정복해 나가는 것이다.
목표를 과하게 세웠다가 역부족이라서 수정하거나 중도이폐하는 경우가 있듯이, 등산도 무리하게 잡았다가 코스변경을 하거나 오르다마는 경우도 있다. 이상은 높을수록 좋다지만, 너무 높으면 그야말로 공상에 불과하듯이, 등산도 너무 무리한 계획은 세우나마나한 사상누각이 되고 만다. 그래서 분수를 알고, 실현 가능한 목표를 조금씩 높여가며 세우고 하나씩 이루어나가는 사람이 성공하듯이, 등산도 체력이라든가 장비라든가 기상조건이라든가, 여건에 맞는 산이나 코스를 택하여야만 차츰 높은 산을 오를 수 있는 것이다.
산정에 오르려면 코스선택이 중요하다. ‘무작정 길 따라 앞으로만 가면 된다’고 생각하였다가는, 안내표시가 되어 있는 길이라면 몰라도, 도깨비에게라도 홀린 듯이 산허리를 뱅뱅 돌 수도 있고, 산정에 오르더라도 쓸데없는 다리품만 팔게 되며, 대개는 시간에 쫓기어 산행을 즐기지는 못하게 된다. 인생도 마찬가지이다. ‘무작정 열심히만 살면 된다’는 생각은 무모하다. 목표가 정해져야 나아갈 방향을 잡을 수가 있고, 방향이 정해져야 계획을 세울 수 있다. 인생살이든 등산이든, 그래서 코스선택은 신중히 해야 하는 것이다. 성공을 바란다면 자신의 능력이나 형편에 맞게 택해야 함은 물론이고.
능력이 출중하거나 장비를 갖춘 사람은 지름길을 선택할 수 있다. 돌아가는 길보다는 조금 험해도 가급적 직선코스를 택하여 짜릿짜릿한 스릴과 그때마다의 성취감을 맛볼 수 있는 것이다. 학교시험에서 우수한 성적을 내거나 경연대회에 나가 상을 타거나 하는 기분은 험한 바위를 타는 가파른 코스를 오르고 난 다음 느끼는 짜릿함과 별반 다름이 없다. 남들은 가파르다며 지레 겁먹고 완만한 코스로 우회함에도 불구하고, 비록 위험하고 힘은 들어도 지름길인 난코스로 올랐을 때의 그 우쭐한 성취감은 밤샘 공부하여 본 시험에서 만점 받은 기분이다. 그러나 무리는 금물이다. 능력도 안 되는 사람이 무리하다가는 다친다. 뱁새가 황새걸음 흉내 내다가 가랑이 찢어지는 꼴로.
위와 앞만 보고 억척스럽게 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의미 있는 삶을 추구하는 사람이 있다. 능력이 뒤지거나 형편이 좋지 않은 사람일수록 여유를 부릴 수가 없어 “Why not?”을 외치며 메마르게 살아가는 것이나, 이는 결코 아무나 흉내 낼 수 없는 외곬인생이다. 함부로 폄하할 수는 없으나, 회한이 남기 쉬운 삶이다. 등산을 하는 사람의 모습도 마찬가지이다. 어떤 분은 그야말로 무슨 한풀이라도 하듯이 산꼭대기와 길바닥만 바라보며 우직스럽게 걷는다. 오르는 길목에 볼거리는 있는지 중간 중간에서 바라보는 전경은 어떠한지는 도무지 관심조차 없다. 그런 분에 있어서의 산행은 산정정복의 성취감 외에는 아무런 의미도 없어 보인다.
산정에 오르면 대단한 그 무엇이 있을 줄 알지만 대개는 잠시 동안의 성취감이 전부이다. 산정에는 오래 머무를 수 없기에 그야말로 짧은 순간 성취감으로 자족하는 것이다. 혹자는 산정에서 펼쳐지는 전경에 대하여 자화자찬하듯이 미화하려 애를 쓴다. 오르는 동안 고생을 한 자신에 대한 연민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는 듯한 모습이다. 그러나 뻘뻘 흘리던 땀이 식으면서 오한이 느껴지듯, 벌써 마음 한구석은 원인 모를 허전함으로 차오른다. 마찬가지로, 원하는 출세를 하고 남부러운 부자가 되더라도 가슴 벅찬 행복감이 오래 가지는 못하는 게 인생살이다. 망가진 건강이나 찾아드는 우환이나 걱정스런 자식들, 고민거리는 예기치 않은 곳에서 터지기 마련이다. 행복을 시기하는 악마라도 있듯이. 때로는 다시는 되돌아 갈 수 없는 시절에 대하여 ‘달리 살았더라면’하는 아쉬움에 가슴이 저민다.
인생의 내리막이든, 하산 길이든, 보람보다는 으스스한 허탈감을 더 느낀다. 뒤처지어 중도에 포기한 줄 알았던 일행이 얼마 안 있어 멀쩡하게 산정에 오르고 다 함께 하산을 하다보면, 혼자서 용쓰며 각박하게 오른 산행이 후회되고, ‘다음번에는 그런 어리석은 짓은 저지르지 말아야지’하는 반성도 하게 된다. “빨리 가려면 천천히 노를 저어라.” 알기만 하면 무얼 해, 정작 실제상황에 닥치면 허둥대는데.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인 걸, 뭐 때문에 아등바등했는지 몰라. 여유를 가질걸. 행복감은 시나브로 사라지고, 이런저런 회한(悔恨)이 밀물처럼 찾아든다.
한 가지 차이는 있다. 등산이야 아쉬우면 다시 하면 되고 오를 때 보지 못한 구경거리가 있으면 같은 길로 되내려오면 되지만, 한번 지나간 인생살이는 다시 반복할 수가 없다. 그러나 하산 길이나 내리막의 나이가 되면 만족보다는 대개는 아쉽고 우울하다. 산정이든 인생의 목표든, 정복을 했든, 중도이폐하고 말았든, 매한가지이다. 사람은 참 묘한 존재이다. 즐거운 비명은 여유 있을 때가 아니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쁠 때에 내는 존재이니. ‘바쁘다’하면서도 북적거리는 고객을 보고 싱글벙글하는 점포주나 식당주인, 업무과중을 불평하면서도 업무영역을 남에게 떼어주지는 않으려는 조직원. 그러니 내리막길에 이르면 오히려 서운해 하는 것이다. 무용지물이 되었다는 자격지심 때문에.
그래도 등산을 계획한대로 무사히 마치고 귀가하는 차안에서 그 날의 산행을 곱씹어 보면서 보람을 느끼듯이, 인생도 성실히 그리고 알차게 살다보면 보람을 느낄 것이다. 등산이 꼭 산정에 올라야하는 것이 아니듯이, 인생도 당초에 세웠던 목표를 꼭 달성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꿈은 그 자체로서의 의미가 더 있는 것이다.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하지 못하듯이, 성공여부가 그 사람의 삶의 가치기준이 되지는 못할 것이다. 인생이든 등산이든 좀 더 여유를 갖고 “지금이 바로 그때, 여기가 바로 거기”라는 마음자세로 그때그때에 충실하면 어떨까.